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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십자가를 보라 [갈라디아서 2:20] – 옥한흠 목사
(2005.3.20 주일예배)
[갈라디아서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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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20 – 대한성서공회

[갈라디아서 2:20 ]. 책갈피. 개역개정 제 2 장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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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korea.or.kr

Date Published: 3/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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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오늘의 말씀

갈라디아서 2장 20절 (갈라디아서 2:20 / 갈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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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0절 – 더미션

… 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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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21) – 유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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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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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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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십자가를 보라  [갈라디아서 2:20] - 옥한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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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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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20 ]

제 2 장

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 와 함께 디도 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 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 인 디도 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 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 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 와 게바 와 요한 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 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

11 게바 가 안디옥 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 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 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 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 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 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 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 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 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 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신앙이란?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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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0절 (갈라디아서 2:20 / 갈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자신의 복과 유익을 위해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하나님만 섬기고 살도록 예수 안에서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사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늘에 소속된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않습니다. (고전 1:2)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을 자신의 구원과 복을 위해 교회를 다니고 또 교회가 가르치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종교적 어떤 행위들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주일날 외에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이웃들과 더불어 일을 하고 장사를 하고 돈을 벌며 함께 사는 것은 신앙생활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교회에 가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또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고 선교와 구제 등 교회의 모든 일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모든 일에 열심히 봉사하면 자신은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며, 그렇지 못할 경우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을 합니다.

또 생각하기를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예수를 영접함으로 나는 이제 구원을 받았고, 그다음 모든 신앙생활은 자신이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받을 상급을 위해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배워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과 함께 더불어 함께 밥 먹고, 함께 잠자고, 함께 일하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매일을 같이 사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살듯이 신자는 주님께 꼭 붙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과 자신의 상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를 통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지, 주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생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결코 아니고, 신앙의 본질을 놓쳐버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이란?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많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 6:28-29)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에게 여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를 보내주신 것을 언약으로 주시고, 그 언약을 따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신 그 십자가의 새 언약 안에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값없이 주신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나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자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내 이름표를 달고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죽은 자로 산다는 것을 믿는 표시가 바로 우리의 세례인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로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롬 6:3-4)

그리고 바울 사도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이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부활)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8/5)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지금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임을 믿는 것, 이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눅14:27)

죽은 자가 무슨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소망을 두고 살겠습니까?

내가 아직 죽지 않했기에 남들보다 더 편하게 더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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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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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2:20)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21)

제목 : 믿음 안에서 사는 것

본문 : 갈라디아서 2:20-21

설교자 : 조 정 의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지난 4개월 동안 함께 공부한 야고보서의 핵심은 한 마디로 ‘참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모든 환경에 대해서 기쁘게 여겨야 한다, 불평과 차별, 원망이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등을 배웠습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우리는 자연히 ‘내 행위는 과연 그러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날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면 스스로 구원을 확신하고, 또 다른 날 자신이 분노하거나 뭔가 잘못을 했을 때는 구원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행위에 중심을 두고 그것을 강조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행위로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이 율법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날마다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의로움을 얻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에서도 참선을 하고 선행해야 합니다. 이슬람교도 코란의 계율을 지켜야 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가 의로움을 얻는데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주의, 즉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강해질수록 교회 안에는 자신의 삶에 대해 정죄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지 여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큰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을 때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의 영향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야’라며 주변의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다보면, 결국 스스로 연약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노력해도 안 되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화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3절과 15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오직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것은 오직 ‘은혜’로 의로움을 얻는 복음이었는데 그들은 현재 다른 복음을 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장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언급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찾아왔을 때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그의 외식적인 행동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나바도 유혹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할례, 행위에 의지하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냐’며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그들이 들은 복음은 ‘은혜로 온전히 얻는 구원’이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움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행위로 의로움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행위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당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잘 살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의로워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려면 하나님의 온전하고 완벽하신 거룩함만큼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하고 행동에 아무런 죄도 없어야 하며, 말과 행동의 동기까지도 잘못된 것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조금의 악도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 이것을 완벽하게 행하실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하나님같이 거룩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로움의 기준에 오를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다시 ‘행위’ 중심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로 살고 있으니 거룩하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면서 의롭지 못하다고 정죄하게 됩니다. ‘은혜’로 의로움을 얻은 우리가 ‘행위’를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도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절). 이것은 십자가의 강도들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연합한 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 즉 율법의 요구조건을 완전하게 충족시키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다 이루었다”의 의미입니다. 율법은 완벽한 삶을 요구합니다. 말과 행동,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처럼 거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율법의 저주는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가 정죄 받고 죄책감을 받으며 죄의 심판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와 같은 율법의 모든 요구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게 하거나 덜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고, 실패하고 낙심하며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나의 모든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거나 분노케 할 수 없고, 반대로 내가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거나 나에게 어떤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정도면 거룩하니까 나를 사랑해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옷 입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여전히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역시 우리가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옷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여러분을 의롭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행위를 가지고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 이 말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산다거나, 내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무조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때로 죄를 짓기도 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하며 화를 참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살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믿는 자 안에는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성령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날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성화된 삶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삶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사도 바울도 여전히 연약한 육체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 안에서 잘 산 것 같지만 어떤 날은 죄로 인해 실패하는 삶을 삽니다. 아브라함은 때로 믿음의 조상처럼 살지만 어떤 날은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는 연약함을 보입니다. 이방신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을 선포했던 엘리야도 어떤 날은 두려움에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자신을 보면 연약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육체를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요 15:9),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오늘날에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가끔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도 그런 일은 힘든 일인데, 하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양 되신 하나님이 영원토록 받으셔야 할 합당한 대우는 이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2,13). 그런 예수께서 어떤 일을 당하셨나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2-4). 찬송과 영광 존귀를 세세토록 받기에 함당하신 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멸시와 조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열두 군단이 더 되는 천사를 데리고 그들을 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죄가 있었을까요. 주님은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20절).

예수님은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의로움을 옷 입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의지한다면 넘어지고 좌절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육체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행위를 의지한다면 예수님이 헛되이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의로움을 얻었고 또한 은혜로 성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로 성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은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성령을 통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 기쁨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마음껏 살아도 된다’,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순종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자녀가 말을 잘 듣는다고 부모가 더 사랑하거나,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한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강령들을 종합하면 한 마디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때 기뻐하시는지 성경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마지막 날에 성도들이 쌓아올린 것을 태울 때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으로 그의 상이 주어질 것인데, 태울 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면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해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고 평생을 헌신한 부모에게, 어떤 감사도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후회와 부끄러움이 어떠할까요?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늘에 속한 좋은 것들, 신령한 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비하신 복이 많이 있습니다. 자족하는 삶과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은혜와 축복을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순종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고 부부가 서로 닮아가듯이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순종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부모의 말에 사사건건 불순종하면서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자녀가 있을까요? 순종하지 않고는 친밀한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사랑하십시오. 은혜와 사랑이 넘치시고,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품어주시고, 죄를 짓고 돌아와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우리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때때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처럼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움으로 바라보십니다.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온전히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제목 : 내 삶이 십자가를 뒷전에 둘때 고장난다

본문 : 갈라디아서 2:20

프로 운동 선수들은 항상 잘 하는 게 아닙니다. 왜 이러지 할 정도로 안 풀릴때가 많습니다 .소위 슬럼프에 빠질때도 있다. 물론 슬럼프는 운동선수에게만 오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온다. 그 대상이 비지니스 맨, 직장인, 일반인 할 것 없이 다 겪는다.

그러면 왜 자꾸 슬럼프에 빠질까?

많은 이유들이 있다 .운동선수 들이 난 잘하니까.. 연습은 안해도 돼 지뭐..라고 교만한 생각을 가질 때에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 집중하지 못하고 딴 것에 신경쓸때에 위기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불평 불만을 자주 내뱉는다. 뭔가 못 마땅한 게 많다.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늘 걱정한다. 크게 보면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슬럼프에 빠진다.

삶이 힘들수록 해결 방법은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분노가 치밀지만 참고 또 참으면 얼마나 좋은 결과가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시 십자가를 붙들때에 다시금 깨닫는 것이 뭘까요?

첫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느니.. 나의 정체성은 십자가에 죽은 나다. 내가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슬럼프의 원인을 위에서 크게 불평 비교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는 한 이 세가지에 의해서 괴롭고 두렵고 불안할 뿐입니다 .다시 십자가를 붙들 때에 우리는 이런 쓸모없는 낭비를 줄 일 수 있습니다 .

십자가는 생생하게 나를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내가 누구인지 자기 인식이 분명해 집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 다시 설때에 우리는 영적 질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질서라는 말은 우선순위 입니다. 내가 중심이냐 아니면 그리스도가 중심이냐 입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면 갈수록 내가 얼마나 내 고집대로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나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나를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

둘째,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라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깨닫는 것은? 내 안에 주인이 나였음을 알게 한다.

내 안에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다시 십자가 앞에 올 때에 파노라마처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주 분명하게 본다.

십자가가 나의 삶에서 뒷전으로 밀리면 어떻게 될까? 자아는 세상에 현혹된다. 겉으로는 믿음이라는 허울속에 내 평판만 생각한다. 나의 허세, 생색, 자기 과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이 될 때에 아름다운 삶을 구가할 수 있다.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흔들렸던 영적 질서를 든든히 세워준다

십자가에서 멀어진 자아에서 십자가로 가까워져야 한다.그래서 빌 2:3-4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무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십자가는 나를 보게도 하지만 십자가는 나를 다시금 강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됩니다 . 반면에 십자가를 뒷전에 두면 둘수록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더 약해질 뿐이다.

자신들의 부족한 약점들이 많다. 그러나 십자가를 붙들고 살 때에 강해 진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을 고백한다.

십자가를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따라 조석지변으로 변한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은 철저한 상황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이동이다.

오직 예수를 방향 삼고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용기를 갖고 나아간다.

마지막, 다시 십자가로 돌아갈 때에 지금처럼 살 지 않는다.

갈 2:20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믿으면서도 습관적인 옛 성품을 드러낸다. 더 이상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매 순간 마다..이런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 내 안에 사는 이는 그리스도다. 내가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을 매사에 인정하며 산다. 십자가 아래 서면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법을 깨닫는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낭비하는 삶은 믿음이 없을 때에 자주 나타난다.

믿음이 없다 보니까 자꾸 슬럼프에 빠진다. 불평, 걱정, 비교로 인해 삶이 행복할 수 없다.어느새 세상에 마음이 젖어 있다. 십자가를 붙잡고 살자. 그러면 더 이상 낭비하지 않는 삶에 집중할 수 있다. 십자가는 나를 거품과 뻥튀기 인생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십자가로 돌아올때에 나의 삶은 예수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충만히 경험할 것입니다.

다시 십자가 앞에 서 보라.

짧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된다. 믿음이 없어 삶을 낭비하며 살아서는 안된다. 세상에 빠져 살면 잘 사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면이 고장날 뿐이다. 이걸 알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확신하는 자는 내가 내 마음대로 살지 않는다. 매 순간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이제 이후로는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려고 합니까?

매일 이런 기도를 드려요..아무도 마지막 날에 삶을 낭비했습니다.하지 않게 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잘 사는 삶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다. 바른 인생이다.

내 자아가 세상에 빠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뒷전에 두고 있지는 않는지 .. 깊이 묵상해 보자. 길이 아닌 길을 자꾸 가려고 하면 뭐만 남을까? 꼬이는 일만 볼 것입니다 .

내가 왜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다른 것으로는 제대로 보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분명하게 자신을 청진기로 호흡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상에 무너졌나요..십자가로 다시 일어서자.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자.’그리고 앞으로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자.

바울은 다시 십자가 앞에 선다.

그리고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이 죽는다. 날마다죽노라… 내가 그리스도 앞에 죽을 때에 내가 산다.

왜 나의 삶이 그동안 고달픈 인생이었는지.. 십자가 앞에 서니까 답을 얻는다. 십자가를 뒷전에 두고 살수록 자아는 병들 수 밖에 없다. 고장 날 수 밖에 없다.

다시 십자가 앞으로 오라

내 안에 가득찼던 욕심들 .. 이제 다시 버려라.

내 안을 텅비게 하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을

다스리게 하라.

그리스도가 경영하는 삶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다시 삶이 정상회복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추구해 가시는 오늘 하루가 되면 어떨까!!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은?

(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율법과 연계된 개인적 진술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됨을 시비하면서 복음 외에 율법도 지켜야만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2:14까지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을 한 후, 2:15부터 마지막까지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한 변증입니다. 본문이 속한 큰 문단은 2:15-21까지인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책의 내용을 분해해도 벌써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던 “나”는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원죄하의 옛 자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구절 전체로는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결과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설명하면서 못 박힌 것은 “옛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롬6:5-7)

그런데 본문만의 특유한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15-19절과 21절 사이에 본문(20절)이 복음을 힘겹게(?) 변호하는 모습으로 끼워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율법과 연관된 못 박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 15-17절까지는 의로워지는 주체를 “우리”라고 표현하다가, 18-21절에선 “내”로 바뀌었습니다. 본문이 속한 후자는 바울 자신이 거듭났던 체험에 바탕을 둔 진술이라는 뜻입니다.

이 둘을 종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개인적으로 중생한 후에 율법에 대해 갖게 된 생각을 십자가 복음과 대비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의 경우에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은 구체적으로 “도덕적 죄를 넘어서 율법에 따라 행했던” 옛 자아라고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회심 체험

바울이 스스로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다고 고백했습니까?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

그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로 따져도 흠이 없다고 자부했던 자였습니다. 도덕적으로 따져 크게 하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이미 하나님을 아주 열심히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고 선을 행하는 기준도 틀렸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깨어진 옛 자아는 생판 불신자였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전 제사를 지내며 율법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구원에 들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로선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나사렛의 젊은 사형수 랍비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것은 처단하여 없애야 할 이단 중의 이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열심이 지나쳐 스데반을 돌로 처형토록 주도, 최소한 적극 가담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는 순간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는 말은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여겼던 자기에겐 없는 그런 신비하고도 견고한 믿음이 못내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자를 핍박했던 것도 그런 안타까움, 시기, 궁금증을 해소해보려는 그만의 몸부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 산헤드린에서 허가를 맡아 다메섹까지 신자를 잔해하러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광채가 비취자 삼일 간 봉사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자 일생일대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가장 먼저 깨달았던 점은 이단 중의 괴수라 여겼던 예수는 정말로 부활하여 승천하여서 스데반이 말한 대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서계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거기다 삼일 후에 자기와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한 이름도 없는 예수 믿는 신자가 찾아와서 기도해주자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의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것도 핍박을 받아 마땅한 이단이 도리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자신의 상태와 있는 곳까지 정확하게 알고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이 사건 이전까지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자, 사울이었습니다. 지식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그보다 나은 자는 아마 실제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자기가 세상 앞에 자랑하며 쌓아왔던 모든 것이 예수 앞에선 정말 아무 짝에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지성적 영적 판단으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죽어 마땅한 한 신자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고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에 있는 전지전능하신 예수가 신자들을 죽이려 그렇게 설쳤던 자기를 삼일 간의 죽음 체험만 시키고는 죽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왕과 방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한순간에 당신의 철천지원수에서 열렬한 전도자로 당신께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대체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선 그저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로선 정작 죽어야 할 자는 예수 믿는 신자가 아니라 자기였고, 정작 이단도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율법의 의를 자랑하는 유대교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꿇어 엎드려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에 완전했다고 자랑했던 자기의 의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덧입혀졌던 것입니다. 이제 이름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인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한 후에 바로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세상에서 모든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2:7,8) 또 자기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자는 자기를 그리스도에 못 박는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인 내지 외면하고 만사를 자기 소견대로만 살았던 것이 얼마나 큰 죄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 땅이 전부인줄 알아 현실적 형통과 일신상 안락만 추구함으로써 윤리적 죄도 수없이 범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자기라는 존재 전부가 썩어서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데 깨끗케 할 방도는 도무지 없음을 절감하고 애통하며 진정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에 머물 틈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곧바로 너무나 큰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을 체험적 진리로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자기 속에 새 생명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예수만 증거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옛 자아가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것입니다.

바울은 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자기가 능동적으로 자기를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 않습니까? 주님이 나타나 그를 단번에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 가운데 그리스도가 와서 사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내주하여서 평생 떠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으로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울의 중생 체험은 예수 믿은 모든 신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율법과 십자가

그럼 서두에 말씀드린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율법과 관련된 “십자가 못 박힘”의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완전히 버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교회에 출석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율법, 행위, 육체 등과 은혜, 믿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일관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된 배경이 무엇입니까?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행위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기에 당연히 지켜야 했습니다. 이미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그분이 주신 법을 지킨다면 누가 뭐래도 구원은 확실히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도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몰랐던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스스로 자신했지만 사실은 율법으로도 의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단지 문자적으로 지켰을 뿐입니다. 거기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는 마지막 계명은 온전히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이웃의 물건, 부동산, 돈을 훔친 적이 없었기에 의롭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의미라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실상 중복되는 셈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 모든 범죄는 이웃을 탐내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웃의 생명, 아내나 남편, 재물, 인격 등을 탐했던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난 것들입니다. 대신에 ‘탐내는’ 것은 아직은 죄가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율법도 마음에 탐하는 것마저 죄라고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며, 또 형제를 보고 바보라 욕해도 살인과 같은 죄라고 가르쳤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고 또 신자를 핍박한 것은 물론 이단이라는 종교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린 원인 중에 시기 질투심도 분명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어떤 위대한 인간도 이 마지막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썩어빠진 죄인이기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지 않고는 구원의 방도가 없습니다. 율법은 죄의 저주를 깨닫게 만들어서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 자신의 모든 지난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선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의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보니까 가장 추한 자였음을 철두철미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깨어져 엎드려야만 한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도 드디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던 것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구원의 원리를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새사람이 되고 난 후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이 여겨집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주님을 경배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님께 구원해달라고 비니까 당연히 그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은 자기는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는 지옥가야 한다는 불신자와 여타 모든 종교인들의 신념입니다. 뒤집으면 자기는 착하고 남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반드시 착한 자에게 그 착한 만큼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이 뭔가를 바치면 하나님은 그에 비례하는 것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선행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선행이 신에게 바치는 것 중에 가장 의로워 보이기에 보상을 가장 크게 받으려는 욕심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당연히 이와 정반대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보시기엔 도무지 열 번째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너무나 추하고 불쌍한 죄인임을 매순간 자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 앞에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진심으로 실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바쳐선 그 바친 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생각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고 여전히 의인이라고 자랑하는 꼴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가야 옳다고 큰소리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교만이자 죄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어 인간의 모든 죄책을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의 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이 사랑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언제 어디서 아무리 죄 많고 후패한 모습으로 있더라도 무한하고도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율법적, 기복적, 독선적, 인과응보적인 하나님 개념을 갖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철저히 깨달아서 완전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할례를 꼭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거나 더 확정적으로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례 또한 행위로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복을 더 받거나 그분 앞에서마저 자신들은 남보다 뛰어난 자라고 자랑하려는 생각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그분을 다시 죽이는 짓입니다.

그래서 본문 뒤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예수 믿고 나서도 하나님께 율법적, 기복적, 독선적, 인과응보적인 개념을 갖고 나아가면 바로 그분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에 장애되는 것은 전부 못 박으라.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는 것”(고전9:27)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함”(고후10:5)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갈2:20)는 세 구절은 그 문자적 서술만 보면 언뜻 비슷한 뜻 같이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자기 속의 죄의 본성, 물질적 탐욕, 세상에 대한 미련, 이기적 성향 등을 의지적으로 죽여서 죄를 안 짓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 세 구절 다 그런 초보적이고도 넓은 뜻으로 적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전체 문맥과 당시 상황과 저자의 의도 등과 대조하면 각기 다른 뜻입니다. 첫째는, 복음에 방해된다면 사도로서의 선한 자유와 권리마저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대적하는 인간적 관습, 지식, 철학, 종교 등 어떤 견고한 진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과 함께 역사하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옛 자아가 죽는 것은 물론, 믿기 전에 갖고 있던 율법적인 하나님 개념을 완전히 없앴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만 주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 있든 십자가를 통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용서는 신자로 신의 성품에 참예시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기에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나면 그분께 바친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그 바침이 구제 선행 봉사 예배 헌금 전도 심지어 기도와 믿음이라도, 기대와 예상과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절대 신자를 떠나지 않으므로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안 짓고 거룩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불신자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나아가 어지간한 신자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믿음으로써 구원 얻은 은혜 가운데 있음도 확신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고의로 계속해서 죄 짓거나 하나님을 다시 외면 거부하지는 않기에 구태여 그런 측면을 성경이 계속 강조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되 그 보상을 바라는 미련은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선행과 믿음에 보상해주지 않거나 일부러 고생만 시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첫째 이유가 절대로 그분이 주시는 선물 때문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바꾸어 당신의 뜻을 이루는 일군으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 기꺼이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더러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도 단순히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하라는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주인이 되려는 생각부터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도 자기중심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원대로 잘 응답해 주지 않으니 결국 자기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 소원대로 응답을 받기 위해선 아무래도 뭔가 바쳐야겠다는 이전의 잘못된 생각이 다시 발동하게 됩니다. 구원 이후 날마다 십자가에 정작 못 박아 죽여야 할 것은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미심쩍음과 오해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신자가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동일한 뜻이 됩니다. 십자가 복음과 위배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을 죽이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신자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일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것입니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대신에 그것들에 묶이어 신음하는 영혼들을 복음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 위해서 복음 전파에 위배된다면 신자의 자유와 권리마저 포기하고(첫째 구절의 뜻),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무너뜨리고(둘째 구절), 마지막으로 율법적 기복적인 신관(神觀)을 완전히 버리고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된 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셋째 구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이미 살펴본 대로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라는 키로 풀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세상의 어떤 철학, 사상, 도덕, 윤리, 종교와도 그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직접 이 땅에 보내시어 죽여야만 했던 이유와 의미와 결과를 적은 책입니다. 또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그분의 직접 대놓고 말씀하시는 살아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읽은 후가 아니라 전부터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파한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1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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