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일지 요약 | ★[백범일지] 설민석 강독 풀버전★ 김구의 유언이자 자서전! 독립운동의 생생한 기록 [백범일지] |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 The Page-Turners Ep.8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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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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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설민석 강독 풀버전★ 김구의 유언이자 자서전! 독립운동의 생생한 기록 [백범일지]
↓↓↓
00:54 우리가 몰랐던 김구! #역적의후손 #소문난개구쟁이
05:44 12세, 김구 인생의 첫 전환점!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관상가 꿈나무가 되다?!
11:18 김구, 하늘을 달리는 도인(?)을 만나 동학에 눈뜬 사연
14:43 김구와 안중근의 운명적 만남
17:01 임시정부의 문지기, 경무국장 김구
18:40 이봉창 \u0026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타오른 희망의 불꽃!
25:30 66세 김구, 광복의 꿈을 꾸다
27:46 끝내 이루지 못한 ‘나의 소원’
TV로 읽는 독서 수다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
매주 (화) 저녁 8시 10분 tvN
#책읽어드립니다 #설민석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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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내용 요약 (1. 상권 : 자서전 / 2. 하권 : 1932.1.8이봉창, 1932.4.29윤봉길부터 광복후 귀국까지 / 3.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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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범 일 지 내용이 긴 감상문입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본문 마지막 굵은 글로 쓴 <나의 소원>을 읽어 보세요. 많지 않은 책을 읽고 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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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줄거리 요약과 책내용 소개 및 백범일지 감상평

백범일지 줄거리 요약과 책내용 소개 및 백범일지 감상평 – 백범일지 독후감,서평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선생이 본인이 스스로 곧 죽을 것을 인식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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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일지 줄거리_gdkluber

백범 일지 줄거리 gdkluber 각종 관련 정보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소개 플랫폼, gdkluber는 백범 일지 줄거리 가격 컨설팅, 메이커직송, 메이커벤더, 실속가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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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설민석 강독 풀버전 김구의 유언이자 자서전! 독립 …

백범일지 줄거리 요약과 책내용 소개 및 백범일지 감상평 – 백범일지 독후감,서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백범일지 책내용 소개 2.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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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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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백범김구) 독서감상문(독후감) – 인포지아

백범일지(김구)를 읽고 이번에 읽은 책은 백범 일지로써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라 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신 독립 운동가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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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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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백범 일지 요약

  • Author: tvN STORY 티비엔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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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2.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cww9E8Lki8

28. 백범일지 내용 요약 (1. 상권 : 자서전 / 2. 하권 : 1932.1.8이봉창, 1932.4.29윤봉길부터 광복후 귀국까지 / 3. 나의 소원)

28. 백범일지 상권, 하권, 나의 소원을 읽었다. (도진순 번역과 해설, 돌베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소원’ 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1947년의 글은 알고 있었고, 훌륭한 독립 운동가이자 남과 북이 나뉘어짐 없이 하나인 독립국이 되기를 희망했던 분이었다고 김 구 선생님을 알고 있던 나의 손에 백범일지가 쥐어져 있었다. 아직까지 못 읽어본 것이 좀 쑥스럽지만 지금이라도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읽을 책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무튼 이제 읽어 보았다. 우리 민족의 등불이셨고 훌륭한 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 상권

백범일지는 우선 상, 하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김구 자신의 탄생부터 가족의 뿌리와, 파란 만장했던 본인 삶의 일대기를 알려주기 위해 54년간의 삶을 (즉, 1876년 ~ 1929년까지) 기록한 자서전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삼일 운동 직후인 1919년(44세)에 상해로 와서 생활한지 10년 정도 지나갈 즈음에, 자식들에게 따뜻한 정을 주지 못한 아버지로서, 한국에 살고 있는 두 아들 김 인(11살)과 김 신(7살)에게 나중에 읽을 수 있도록 지은 책인 것이다.) 자식에게 아빠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내용이 주로 담겨있고, 당시(조선 말기) 한 지역에서 살았던 평범한(?) 한 인물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시대의 분위기를 익히기에 좋았다. 김구 본인이 날짜같은 것은 틀릴 수 있지만 절대 거짓은 없다고 아들에게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꾸며낸 것 같은 얘기는, 내가 읽는 동안에도 전혀 없어 보였다. 날짜와 사람 이름은 다소 혼동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더 솔직하게 쓰고 있음을 반증하는 듯 하다. 상권의 내용은 태어나서부터 중국 상해로 와서 10년 정도 흐른 시기까지의 내용이 들어있다,

2. 하권 

하권은 본격적으로 일본에 무력으로(지금으로 보면 게릴라 투쟁) 저항하기 시작한 이봉창(1932년 1월 8일), 윤봉길(1932년 4월 29일)의사의 구국항쟁부터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 의거를 한 이후, 높아진 임시정부의 위상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와 상해에서 탈출하여 중경에 정착하기 까지 독립을 위한 국내 단체들과 해외 단체들의 활동과 삶,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도움 등이 그려져 있고, 또 중요한 것은, 1941년부터 미군, 중국군들과 함께 광복군을 훈련하고 조직하여 한반도에 침투시키기 바로 전 일본이 1945년 8월 미국에 갑작스런 항복을 하면서, 우리힘으로 독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망의 감정과 미국과 소련이 38선의 이북과 이남을 갈라서 군정으로 지배하면서 임시정부에게도 ‘한국정부의 자격’이 아니고 ‘그냥 개인 김구’로 돌아오는 것에 서명하고 돌아와야 했던 일, 그러나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에 돌아와서는 전국의 한국 국민으로부터 대통령급의 환영을 받는 이야기와 전국 각지를 순행하며 받았던 환대와 감회가 기록되어 있으며, 개성을 순행하면서는 고향 마을 쪽으로 갔지만 고향은 38선 이북이라서 소련의 군정이므로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돌아와야 했던 일이 안타깝게 그려지면서 하권이 끝이 난다.

3. 마지막에 작성한 글 = 나의 소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내는 나의 소원 일갈) 

세계 최고의 연설문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 민국의 지도자 백범 김 구 선생님의 사상이 집약적으로 들어 있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이 마지막에 들어 있다. 아직도 달성되지 못한 김 구 선생님의 소원이 나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꼭 실현될 것임을 믿는다. 너무나도 훌륭한 이 나의 소원 부분은 따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첫째, 상권의 내용을 살펴본다.

(김구가 태어날 때 본명은 ‘김창암’이다. 이름을 여러번 바꿔 쓴다.)

1. 김구의 본관은 안동 김씨로 ,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르고, 고려에 투항하여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가 된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조상이다. 경순왕의 자손으로 고려 익원공이 김구가족의 시조이고, 김구는 익원공 21대손이다. 대대로 벼슬을 지내는 훌륭한 집안이었으나, 조선 중기 인조 반정의 공신이었다가 효종때에 역모죄로 죽은 김자점도 김창암의 조상이다..

2. 조상 김자점(1588~1651)의 역모사건 이후, 경기 고양으로 잠시 떠돌다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 해주 서쪽 백운방의 팔봉산 아래 양가봉에서 쭉 생활하였는데 역적 자손임을 숨기기 위해 계속 ‘상놈집안’으로 살아야 했다. 해주에는 덕수이씨와 진주 강씨가 양반으로서 크게 행세했다.

3. 1876년 음력 7월 11일 아버지 김순영(27세)과 어머니 곽락원(17세) 사이에서 실질적인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젖이 안나와서 아기때는 동네의 핏개댁에게서 젖동냥으로 커서 마음이 짠함. 세살 때 천연두로 얼굴에 마마자국 많음.

4. 1880년 다섯살 때, 김구를 공모해서 때려주던 동네 형들을 칼로 죽일 거라고 생각하며 식칼을 들고 갔다가 더 얻어터지고 칼도 잃어버린 일 있음. 아버지 숟가락을 반으로 잘라 엿바꿔먹었다고 아버지에게 말해 꾸중을 들었던 일 있음. 집에 있던 돈 스무냥(지금으로 보면 20,000원 정도?)을 슬쩍해서 떡 사먹으러 가다가 친척에게 걸려서 아버지에게 죽을 듯이 얻어터지다가 재종조부(할아버지)가 구해줌.

5. 1882년 일곱살 때, 아버지는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에게 자주 폭행을 가해 그들이 나을 때까지 김구의 집에 와서 생활하는 풍습이 있었음. 아버지는 관아의 직원들에게 뇌물같은 것을 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옥살이를 오래 하지는 않으셨다. 양반들은 아버지에게 도존위(면서기정도)를 시켜주기도 하였다.

즉 김구는 어린 시절 상놈인 면서기의 자식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아버지가 말술이었으므로 엄마는 김창암에게 술을 입에 대면 엄마가 자살할 것이라고 교육하고 맘깊이 새김.

6. 1887년 열두살 때, 아버지를 졸라 동네의 삼류 선생을 집으로 불러서 한자 공부를 시작함. 첫시간에 ‘마상봉한식’이란 다섯 글자 배우고 좋아서 계속 외움. 6개월 정도 공부했고 김구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시험도 100점을 받고 귀염을 받았다. 같은 반 친구의 아빠의 시기로 선생 내쫓음. 공부 접음. 아버지가 반신불수가 되서 부모님이 치료를 위해 지방으로 떠남.

7. 1889년 열네살, 아버지가 다소 회복, 다시 함께 살며, 서당에 다시 다니기 시작함. 겨우 책을 읽고 문서 작성 정도 할 실력이었음. 통감이나 사략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진승의 말이나,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말, ‘빨래하던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한신의 말 등이 기억에 남음. 시덥잖은 선생이 대다수 였지만 ‘정문재’라는 훌륭한 동네 스승에게 수강료 없이 공부를 하였다.

8. 1892년 열일곱 살, 해주에서 과거(지방 향시) 실시하여 응시하였으나 엉망진창인 과거 시험장과 분위기를 보고, 과거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고 다짐함. 아버지는 실용적으로 관상공부(사주 관상)나 하라고 조언하여 따름. 관상에 따라 자기 얼굴 보았으나 형편없이 못생긴것이 귀한 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음. 그러나 책 속에 ‘좋은 얼굴보다 좋은 몸이 더 낫고, 좋은 몸도다 좋은 마음이 더 낫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음. 1년간 동네 아이들에게 훈장질을 하며 가르침.

9. 1893년 열여덟 살, 계룡산 정도령 이야기가 유행하여 조선이 곧 망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횡횡. 옆동네에 충청도의 유명한 동학 선생인 최도명의 직계 제자 최유현, 오응선이 살고 있다기에 만나보러 방문. 들리는 이야기로는 동학의 선생들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소문도 있었음. 상놈인 김창암에게 양반인 그들이 예절로 대해줌. 동학은 용담 최수운이 천명하였고, 해월 최시형이 대도주로서 포교활동 중이라고 전도함. 동학의 목표는 사람들이 개과천선하여 참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설파함.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김창암에게는 빛과 같은 메세지였음. 동학에 열정을 다하여 공부하였고 양반은 별로 없었고 주로 상놈들이 동학에 계속 들어왔다. 나의 전도로 수백명이 김창암의 밑으로 들어왔다. 동학을 공부한 창암의 변화는 “나쁜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만 하게된다” 였다. 김창암은 동학에 가입하면서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였고, 도술을 부리며 하늘을 걷는 김창수라는 소문을 듣는 아기 접주가 되었다.

<열 여덟에 김창암에서 김창수로 개명함=동학에서의 새이름>

9. 1894년 열아홉 살(동학농민혁명의 해) , 황해도 대표 접주로서 16인과 같이 충북 보은의 해월 최시형 대도주에게 찾아감. 해월은 당시 68세였고, 해월 최시형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척왜척양’의 동학교도들 동원령을 내렸다. 첩지를 직접받은 직계 동학 접주로 인정받음. 해주성 함락을 목표로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죽이기로 계획. 패전. 선봉장으로 김창수가 나섰으나, 조금 싸우는데 동학교도 몇 명이 총에 맞아 죽자 뒤의 본부에서 후퇴령 내려서 어쩔수 없이 후퇴하고 훈련에 매진. 정덕현과 우종서가 찾아와서 책사로서 도움을 줌. 안중근의 아버지이자 훌륭한 유학자인 안태훈(안진사)이 동학군을 처부수는 역할을 하다가 김창수에게 은밀히, 젊은 사람이 아까우므로 서로 치지 말자는 밀약을 하여 성사됨. 구월산 패엽사(절)에서 훈련함. 김창수가 홍역으로 아파 누워있을 때 구월산의 또다른 접장 이동엽이 그의 농민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처들어와서 김창수의 농민부대를 처부숨. 그러나 김창수는 직계 접주였으므로 건들지 못함. 김창수의 오른팔 이용선이 총살당함. 왜군이 패월사 부근에 동학군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패엽사의 이동엽군을 소탕해버림.

10. 1895년 스무살,(패장으로 안중근의 아버지인 유학자 안진사 집에서=명성왕후 시해가 있던 해). 김창수는 이 일로 동학군에서 나와 몰래 청계동 안진사의 계곡 마을에가서 기거하며 공부하였다. 극진히 대접받음. 안진사와 학문적인 얘기를 나누던 학자 고능선을 만남. 고능선은 김창수에게 중국 고전과 많은 학문적인 내용을 직접 전수해줌. 김창수에게는 잊지 못할 큰 스승임. 김형진과 청나라에 다녀옴. 2년간 큰 공부를 함. 중국에서 돌아오자 전국에 콜레라 발병으로 고능선의 아들내외가 사망. 손녀 사위로 들어가기로 했으나 아버지의 옛적 친구와의 선약으로 무산됨.

11. 1896년 스물 한살,(치하포 사건= ‘김창수’ 왜놈 쓰치다를 주막에서 처죽이고 1차 투옥됨)

1895년 11월 김홍집 내각이 국상중에 단발령을 선포하여 보형의병들이 일어났고, 친러내각 등장했고,아관파천, 내각교체가 일어나서 단발령 정지등이 다시 선포되었다. 2월 하순, 겨울, 배가 얼음 때문에 못가서 치하포 주막에서 머무는데 조선말을 썼지만 왜놈이 한 명 있었다. 명성왕후 시해에 대한 분풀이로서 왜놈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결단하기가 힘들었는데 고능선 선생님의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고, 저녁에 느닷없이 발길질하고 목을 밟고, 왜놈이 흔드는 칼을 뺐어 칼로 그놈(육군 중위 쓰치다)을 난도질하였다.(국모보수) 자신이 한 흔적과 이름을 주막에 써붙여놓고 집으로 옮. 3개월 후 순검과 사령들이 아침에 쇠고랑으로 채워 집에서 잡아감. 사람들은 동학한 것 때문에 잡혀가는 줄로 오해함. 2개월 감방생활 후 인천감리서(교도소)로 이감(7월). 어머니와 함께 배를 타고 이감되는 중에 ‘효자 이창매의 묘’를 보고 눈물을 흘림(효자는 못될 지언정 엄마에게 불효만 하고 있는 자신을 원망함.)

인천에서 투옥은 김창수라는 영웅(왜놈을 처죽인)의 감옥 생활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김창수를 영웅시했다. 사형을 집행하려 했으나 고종이 보류함.

12. 1898년 스물 세살, (2년간의 감옥생활 후 탈옥)

봄에 간수에게 술과 아편들을 제공하고 땅을 파고 담을 넘어서 감옥 동료 네명과 밖으로 탈출함. 각자 흩어졌고, 김창수는 서울(경성)로 곧장 걸어가면서 하루밤 유숙하고 또 계속 서울로 걸어감. 부평을 지나 양화진에 도착. 감방에서 도와주었던 사람을 만나 그 사람집에서 며칠간 푹 쉼.

아래 지방으로 여행. 계속 술을 마시며 과천, 수원, 오산에서 감옥에서 도와준 사람 또 만나서 며칠간 지냄. 노자돈 얻어서 다시 공주로, 은진으로, 강경으로, 전주로, 남원으로 목포로, 해남으로, 강진 고금도로, 장흥, 화순 순창, 하동, 금산으로 계속 여행.

13. 1899년 스물 네살,

계룡산 갑사에 도착하여 선비(이서방) 하나를 만남. 마곡사에 들어가 절이되겠다고 하며 김창수에게도 권함. 김창수는 갑자기 중이 되고 법명은 ‘원종’으로 중노릇 시작하고 불경 공부를 함.금강산으로 여행 간다며 나와서 고향 마을 해주로 돌아옴. 집에서 침거. 안진사나 고선생에게도 가지 않음.

14. 1900년 스물 다섯 살, <김구로 개명>

김창수로 행세하기 위험했으므로 이름을 스스로 <김두래>라고 고치고 낯선 강화도로 김경득(감옥에서 자신을 도운 사람)을 만나러 길을 떠남. 김경득의 동생 집에서 신분을 속이고 훈장질을 함. 유완무와 이춘백이라는 김경득의 친구가 찾아와 김창수라는 영웅이 오면 알려달라고 하는 소리를 엿듣고 만나야 겠다고 생각함. 서울로 상경하여 유완무를 만남. 유완무는 한달 뒤 충청도 연산의 이천경을 만날 것을 부탁. 이천경은 무주의 이시발에게 가라고 부탁. 이시발은 지례군의 성태영을 찾아가라고 부탁. 양반 성태영의 집에서 한달간 유숙함.

유완무와 성태영이 이름을 지어줌<이름은 김 구, 호는 연하, 자는 연상이라 명명함>

여러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은 사람됨을 보기 위함이었는데 김구가 거기서 통과한 것임. 아직 학식이 부족하니 좀 더 공부해야 할 것을 충고함. 그리고 양반에게 눌리지 않도록 돈도 많이 제공해줌. 부모를 모시고 서울고 이사와서 공부를 더 할 것을 종용함. = 고향에서 부친 사망. 허벅지 살을 도려내서 아버지 입에넣어드림. 너무 아팠다. 고향에서 지냄.

15. 1902년 스물 일곱살,

열일곱 처자 여옥이와 약혼함.

김구의 아내 선택 기준 :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음, 둘째, 여자도 학식이 있어야 함. 셋째, 직접 만났을 때 서로의 마음이 맞아야 함.

16. 1903년 스물 여덟살 <교회일과 교사일-결혼하고 2년정도 편안한 생활>

만성 감기로 여옥이 사망함. 직접 가서 장례치러줌.

오진사 집에 학교를 설립. 예수교에 들어감. 공립학교 교사가 됨.

평양의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에 참여함. 안창호 누이동생 안신호(20세)와 혼담이 있었으나 여자쪽에 먼저 선약된 남자가 있었음. 오빠 동생 사이로 남기로 하고. 사평동 예수교회에 다니며 자유 결혼을 원하던 최준례(18세)와 주위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함. 결혼생활.

17.1905년 서른 살,

을사늑약 체결로 사방에서 의병 운동이 발발함.<의병장: 허위, 이강년, 최익현, 신돌석, 연기우, 홍범도, 이범윤, 강기동, 민긍호, 유인석, 이진룡, 우동선등=군사지식 없고 의기만 있어서 모두 실패>

김구는 애버트 청년회(예수교) 소속이었는데 내가 속한 상동교회에 모인 회의에서는 돌아가면서 상소를 올리기로 하였다. 상소를 내는 사람은 사형될 것이므로 한 명씩 순서대로 상소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1차는 최재학외 5명이었고 대한문 앞에가서 상소하였다. 왜놈과 육박전 끝에 투옥되었고, 그들을 풀어주었다. 방향을 바꿔 종로에서 집회를 개속하였다. 왜놈이 사격을 했고 그 날 민영환도 자결하였다. 이상설도 자결 미수. 다시 방향을 바꿔서 애국 계몽 교육에 헌신해야 겠다고 하고 낙향하여 교육에 매진함.

1907년에, 국내외에서 비밀결사가 조직되니 곧 신민회였다. <안창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 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 등을 주축으로 몇사람 더해서 총 400명 가량의 비밀 조직을 운영하였다. 김 구는 행동대장 정도의 역할을 한 것 같다>

18. 1908년 서른 세살,(안악 양산학교 교사생활, 교육계 유지 생활)

서명의숙 교사가 되어 교육에 매진함. 안악 양산학교에서 교육에 매진함. 첫 딸 찬바람 많이 쐰 탓으로 사망. 김홍량이 유학을 다녀와서 안악 양산학교의 교장이 되고 김 구는 최광옥과 함께 해서 교육 총회를 조직하여서 도내의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는 일을 했다. 지방 교육계의 인사로 많은 강연회를 다녔다. 왜놈에 대한 욕을 많이 섞은 강연이었다

19. 1909년 서른 네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안응칠)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저격의 건으로 10월 27일 한달간 구류된다음 해주 지방 재판소로 이송(안중근 사건과는 전혀 관계 없었음). 불기소로 풀려남.

20. 1910년 서른 다섯 살 (경술 국치)

1910년 3월 안중근 여수감옥에서 사형집행.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교육을 통해서 국민을 계몽하면 다시 광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교장일을 계속했다. 신민회원들을 경술 국치 후에는 중국으로 많이 건너갔다. 양기탁의 경성회의에 김구도 참가하였고 독립 자금을 각 지역별로 모을 것을 결의하였다. 독립자금 모으기에 열심.

21. 1911년 서른 여섯살

정월 왜헌병이 독립 투사들을 거의 잡아 가둠, 안명근 사건이 발단이었음. 심문에서 자신이 무죄임을 항변함. 김구는 총 15년 형을 받는다.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생활이 시작됨. (감옥에서의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음). 활빈(의적) 조직의 생존 전략과 조직 운영 등에 대해서 배우게 됨.

22. 1914년 서른 아홉살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여를 지냄. 메이지 사망으로 대사면하여 2년은 면형 + 8년 감형, 그리고 몇달 뒤 메이지의 처가 사망하여 잔기의 3분의 1이 되니 총 5년형이 되었다. 2년만 더 채우면 됨. 다시 활동할 생각을 함. 친일로 돌아선 인사가 많았으나 김구는 결코 ‘몽우리돌’로서 한 길을 가겠다고 다짐함.

<<결심의 의지로 호를 기존의 연하에서 백범이라 하고, 이름을 김 구(아홉구)로 지음= 거북 '구'자는 일본의 민적에 등록되었기에 이름을 바꾼 것이고, 백정들도 나 정도의 애국심을 가져야 겠기에 백 범으로 바꾼 것이다.>>

23. 1915년 마흔살

인천 감옥으로 이송

왜놈 간수와 싸워서 노역이 힘든 인천 감옥으로 이송됨.

24. 1917 마흔 두살.

만기 출옥하여 고향으로 가서 동산평에서 소학교를 설립. 시골에서 소작인들에게 부지런히 농사일 하도록 지도하고 권면함.

25. 1918년 마흔 세살,

11월 맏아들 김 인(왜의 민적에는 김린이라고 등록됨) 출생.

26. 1919년. 마흔 네살, (삼일 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조직)

3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 벌어짐. 삼일 만세 참여 권고에 만세로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계획을 잘 세워서 독립을 이뤄야 한다고 하고, 뜻있는 사람은 모두 상해에서 만나기로 약속함. 상해로 가기 위해 신의주행 기차를 탐. 여기 저기서 만세운동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는 말을 들음. 신의주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황해안을 지날 때 일본경비정이 쫓아왔으나 물리치고 상해로 건너가서 상해의 황포 선창에 내림. 신의주는 눈이 있었으나 상해는 이미 완연한 녹색의 봄이었다.

상해에 모인 사람은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는 친한 사람이었고, 미국쪽에서, 일본쪽에서 등등 총 500여명이 모였다= 임시 정부 조직>

상해 임시정부(민국 1년) = 안창호(내무총장), 김구는 문지기를 배정해줄 것을 처음에 요구함. 그러나 다음날 안창호는 김구에게 경무국장(경찰국장쯤) 되는 직위를 내려줌.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김구가 자신이 면서기 자식인데 대한민국의 경무국장은 위신문제로 안된다고 사양했으나 그대로 임명함.

26. 1920년 마흔 다섯살,(민국 2년)

아내 최준례가 맏아들 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와서 같이 삶.

27. 1922년 마흔 일곱살, (민국 4년)

상해에서 가정생활을 지속함, 둘째아들 김 신 태어남.

28. 1923년 마흔 여덟살, (민국 5년)

임정 내무총장으로 집무. 아내 최준례 폐렴에 걸림.

29. 1924년 마흔 아홉살, (민국 6년)

아내 최준례 폐렴으로 사망하여 상해 숭산로 경찰서 후면 공동묘지에 매장.

30. 1926년 쉰 한살,(민국 8년)

어머님이 둘째 신이(5세)를 고향으로 데려감.

31. 1927년 쉰 두살,(민국 9년)

어머님의 분부로 맏아들 인이도 고향으로 보내고 혼자 생활함. 그해 11월 김구는 임정의 최고 높은 자리 국무령으로 추대되었으나 김존위(면서기)의 아들이 어찌 일국의 원수가 되겠냐며 사양하였으나 부득이하게 승낙함. 헌법을 고쳐 곧바로 평등제인 위원제로 개정하여 순차적으로 주석일을 하였다(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

32. 1928년 쉰 세살,(민국 10년)

백범일지 기록 시작

33. 1929년 쉰 네살, (민국 11년, 5월 3일)

백범일지 상권의 기록을 마침.

* 이 글을 쓰기 시작한지 1년이 넘는 민국 11년 5월 3일에 종료하였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여기까지가 상권의 기록이다. 하권은 상권에서 다루지 않은 1931년 이봉창,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일부터 시작하는 독립 운동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하권의 내용을 살펴본다.

1. 전반적인 회고

1919년(마흔 네살) ~ 1931년(쉰 여섯) :

10여년간 상해 불란서 조계지 보경리 4호 2층에 임시정부는 세웠지만 이렇다할 활동도 못하고 정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으며, 직책은 임시정부 경무국장(경찰총장역할) 역할을 5년동안 하고 내무총장(주석)으로 1923년부터 최고의 자리에서 활동하였지만 , 거지 비슷한 생활을 면하지 못했다. 가족들도 같이 살다가 아내 최준례는 죽고, 그 이후 아들 둘과 어머니 곽락원 여사는 다시 한국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혼자 지내면서 이렇게는 안되겠다하여 테러를 감행할 목적으로 ‘철혈남아’들을 물색하며 테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32년(쉰 일곱) ~ 1945년말 입국(일흔)에 환영속에 입국하여, 1946년 한국 전역 순회:

1932년 1월 8일 (쉰 일곱)에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천황폭탄미수), 1932년 4월 29일(쉰 일곱)에 윤봉길 의사의 홍구의거로 임정이 탄력을 받고 대외적으로 인정받음. 미국 루스벨트와 중국 손과 등이 한국이 독립되어야 함을 연설함. 1930년대 부터는 각 나라들이 임시 정부를 한국 정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으나, 공산당(김원봉의 의열단)등과, 민족계열의 당파(김구의 한국국민당)등이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가 다시 합쳤다가를 반복하고, 결국은 한국의 독립이 우선이라는 과제아래에 힘을 합친다. 1940년대에 광복군으로 힘을 합쳐 자주 독립을 위한 군사 훈련에 매진하다가 미국에 의해 남에 의한 해방이 되는데 일본은 물러갔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자주독립이 아니었으므로 매우 안타까웠다.

* 임정의 출발과 기록

2. 1919년 44세에 삼일운동이 있은 직후 상해로 배를 타고 감. 독립 운동의 큰 축인 이동녕 선생을 찾아감. 상해 한인 500여명 등이 한국, 일본, 미주, 중국, 러시아에서 독립 운동을 위해 모여듬. 삼일 만세운동의 원인은 일본이 명목상 지배할 것이라 착각했으나 안악사건의 조작이나 105인 사건으로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을 보고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 제창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미 상해에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회담의 대표로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상해에 모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필요성을 느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승만을 초대 총리’로 임명하고, 내무, 외무, 군무, 재무, 법무, 교통부 등의 부서를 조직하였다.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상해로 도착하여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다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여 1919년 4월 11일 헌법을 반포하였다 .

도산 안창호에게 본인은 출신이 미천하니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하겠다고 자처했으나, 다음 날 경무국장(경찰총장쯤)으로 임명함.

3. 1919년 (44세) ~ 1923년(48세) 까지 경무국장으로 복무.

범죄자 처리는 사형 아니면 무죄방면이었다. 불란서 경찰들과의 좋은 관계로 왜놈들이 함부로 김 구를 연행하거나 하지 못하는 보호를 받았다. 민족 배반자들은 사형시켰고, 죄를 뉘우친 사람들은 풀어주어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했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나름 평범한 생활을 했다.

4. 1919년 이후 두 개의 세력으로 독립운동 전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세력 vs.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양 세력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됨.

공산주의 = 대표자 = 국무총리 이동휘 <레닌의 영향으로 1920년대는 주류였음.>

민족주의 = 대표자 = 이동녕과 김구 (전반적으로 공산/민족 양 파로 나뉘어 독립운동함.)

민주주의 = 대표자 = 대통령 이승만

소규모 무정부 주의자들의 활동 : 이을규, 이자명, 이정규, 유자명등이 상해와 천진에서 활동함.

*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 러시아 대표 파견시 임정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을 차출했으나, 이동휘(공산주의)가 자기 심복인 한형권만 미리 보내고 나중에 발표했다. 이동휘는 김구에게 독립 운동은 단순한 민주주의 혁명이고, 독립이 된 후에 또다시 전 세계가 공산혁명을 해야 하므로 한 번에 바로 공산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김구는 우리만의 힘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없고, 소련의 코민테른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며 도움을 거절했다.

한형권은 소련의 레닌에게 도움을 청하자 레닌이 큰 돈을 지원했으나, 그 돈을 이동휘 일당은 임정에 보내지 않고 자기들끼리 써버림으로 임시정부에서 파면되고 러시아로 도주함. 돈 빼돌린 김립은 총살당함.

한인 공산당의 세 파벌은 1) 이동휘가 대장으로 ‘상해파’ 2) 여운형, 안병찬이 대장으로 ‘이루쿠츠크파’ 3)후쿠모코 가즈오와 김준연이 대장으로 만주에서 활동한 ‘ML파’ 가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공산주의자)’의 두 파벌 싸움 ..

상해파는 임시 정부를 혁신할 것을 주장하고(개조)

이르쿠추크파여운형의 임시 정부를 다시 설립할 것을 주장(창조)함.

**** 김 구가 화를 내며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켜버림.****

그러나 그들은 계속 독립 운동을 공산운동화하자고 주장함.

하지만, 그러나, 소련의 레닌이 “식민지들의 운동은 나라를 먼저 회복하는 것이 사회운동보다 더 우선이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독립 운동으로 다시 힘을 합쳤다. 희한한 일이었다.

* 민족주의자들의 활동 : 1930년 1월 ‘한국 독립당’을 설립하지만, 그 이전에도 계속 활동중이었다.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김 구)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에서의 세력 약화로 만주로 이동하여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와, 남군정서, 북군정서에 침투하여 살벌한 공산 혁명 운동을 하였고 실제로 살부회(친구의 아버지를 처단하는 모임)까지 결성되었다. 백광운, 정일우, 김좌진 등의 장군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만주가 일본과 협정을 맺어 만주도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오히려 신흥학교 시절 이후 30여년간 ‘김일성 무장부대’가 러시아와 중국 의용군의 도움으로 왜놈들과 싸우고 있었다 .

공산주의자들의 실패로 겨우 근근히 민족주의 계통의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26년 모두가 다 임시 정부의 국무령자리를 사양하고 임정에 참여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자, 이동녕 선생이 51세인 김구에게 국무령을 맡아줄 것을 요구하여 마지 못해 받아들임. 김구의 처지가 부인도 죽고(2년전 49세때) 자식들도 다 한국에 있어서 불쌍한 처지로 혼자 살았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많이 챙겨주었다. 특히, 젊은 청년 ‘엄항섭’군이 자신의 월급을 받아 나와 이동녕 선생을 많이 도왔다. 엄군의 부인도 특히 따뜻하게 대해 주었는데 아이를 낳다가 그만 사망하였다.

독립 운동가들 중에 1919년 이후 친일파로 돌아선 놈들 중에는 임정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사 주필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 인’등이 있다.

김 구의 주된 하던 일은 편지를 써서 전 세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음을 알리고 독립 운동 자금을 요청하던 일이었다. 미주 지역에는 특히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교포들이 애국심이 대단했다. 이들은 김구에게 좋은 뜻만 있으면 돈을 송금하겠다고 답장을 해왔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5. 민족의 영웅 이봉창(1932년 1월 8일)의사와 윤봉길(1932년 4월 29일) 의사

이봉창 의사 :

이봉창 의사는 외모가 딱 일본사람처럼 생겼고, 의복도 그렇게 입고 다녔으며 일본어를 잘 구사하였다. 출생지는 서울의 용산이다. 31세의 나이로 일본에서는 일본인의 양자로 컸으며 일본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였다. 계속 일본인으로 위장하며 행세했고, 김구에게만 한국인임을 밝혔다. 1년 가량 상해에서 지낸 후에 드디어 김구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여비와 폭탄을 주었고 1932년 1월 8일 일본 천왕이 환궁하는 길에 폭탄을 던졌으나 폭발력이 강하지 않아서 안타깝게도 주변 사람들만 다치고 말았다. 10월 10일 일본에서 교수형 당함.

윤봉길 의사 :

큰 뜻을 품고 상해로 온 25세의 젊은이 윤봉길은 홍구 시장에서 채소 장사로 변장하여 일을 하던 중 조용히 김구를 찾아와서 자신이 홍구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 말하고 김구에게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1932년 4월 29일)에 큰 일을 하고 싶다고 김구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한다. 마침 다행히 일본의 신문에서 ‘축하 행사를 할 터이니 식장 참가 희망자는 물병하나와 점심 도시락, 일장기를 들고 입장을 하라’는 기사가 나왔다. 4월 28일 윤봉길은 사전 답사를 갔는데 마침 일본놈 시라카와도 리허설로 와 있었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폭탄만 있었으면 던지고 싶었다고 김구에게 말하자 김구가 타이르며 내일 꼭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드디어 1932년 4월 29일 , 윤봉길은 새벽 아침을 김구와 하고 거사를 위해 밖으로 나선다. 아침 7시에 윤봉길은 자신이 어제 산 시계를 필요 없게 되었으니 김구가 차고 있던 싸구려 시계와 바꿔찬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김구의 마지막 말이었다.

10시에 홍거 공원에 폭탄이 터질 예정이었으므로 김 구는 독립지사들이 잡혀갈 것을 염려하여 도산 안창호등의 인사들에게 10시 이후에는 집에서 대피하라고 전했으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서 대피하지 않았다. 안창호, 장헌근, 김덕근 등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고, 김 구는 자신이 주모자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더이상 희생당하지 않도록 “주모자는 나 김구이다”라는 선언문을 영어로 번역시켜 “로이터통신”에 전달하였다 . 그때부터 바로 상해를 떠나 도망자 생활을 시작한다.

6. 피신과 유랑의 생활

1932년 홍구공원 4.29의거 이후 김구의 목에는 현상금이 붙었고, 중국 국민당의 주석 장제스는 김구의 피신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알려왔다. 한국 임시정부의 위상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높아졌고 각지에서 활동 지원금을 보내겠다고 해왔으나 정작 김구는 피신을 다닐 수 밖에 없었다.

1). 상해 피치부인댁 : 미국인 피치 부인댁에서 20일간을 숨어 지냈고

2). 시골 가흥의 ‘진동생’의 저택 :상해 남동쪽 호수 마을인 시골 가흥에서 ‘장진구’라는 가명으로 중국인 사대부 ‘저봉장’의 보호아래 그의 수양아들 ‘진동생’의 저택에서 광동인으로 위장하고 살아감. 일본인으로서 돈을 받고 김구의 첩자 노릇을 해주던 놈들도 많아서 피신에 사용하였다. 오래 머물기 위험하여 장소를 이동함.

3). 주씨 가문의 별장 : ‘저한추’군의 아내의 처가쪽인 해염현으로 가서, 해염서의 주씨 공관으로 가서 그 대 저택의 화원을 보고 전씨 가문의 화원도 구경하였다. 저씨부인과 계속 이동하여 ‘노리언’에사 하차한 후 ‘서남산령’까지 3km 정도를 산을 넘어 걸어갔다. 산꼭대기에 주씨의 산별장이 이었고, 저씨 부인은 돌아갔다. 그 산별장은 ‘저씨 집안’의 묘지기가 살던 곳이고 거기에서 자연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엄항섭, 안공근, 진동생이 김구를 잠시 방문해서 말벗을 해주고 돌아감. 한 10일정도 지나고 다시 가흥으로 돌아감.

4). 시골 가흥 진동생의 친구 ‘손용보’의 집 : 시골 농부의 집에서 아이를 돌봐주며 지냄.

시골에서 마르크스, 레닌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젊은이들을 안타깝다는 생각을 함.

5). 다시 가흥 진동생의 집으로 와서 장진구로 지내며 잠복 : 집에서의 생활이 위험하여 배 위에서 잠을 자며 생활함.

6). 남경에서 5년간 정착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의 집에 매월 돈을 지불하고 부부로 위장하여 생활함. 직업을 고물상이라 하고 호구조사가 나와도 주애보가 경찰과 얘기하여 돌려 보내기도 했다. (5년간 부부로 위장생활)

7. 남경에서 다시 활동 시작

김구는 잠복했으나, 박찬익, 엄항섭, 안공근은 부단한 임시정부 활동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김구는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중국 국민당 장제스 주석과 남경에서 면담(1934년, 59세) 하여 돈 2백만원을 요청하였고 중국 국민당 측은 잠깐의 테러보다 군인을 훈련시킬 수 있는 장소와 돈을 제공하였다. 낙양 군교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중국인 학생들과 같이 받음. 1기로 학생들이 입학했고, 독립군을 소집하니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김창환등의 장교가 모여 들어서 낙양분교에서 훈련에 돌입하였다.

8. 공산당 및 여러 단체들의 통일 바람

의열단장 김원봉군(공산주의)(30대)이 면담와서 김구에게 같이 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김구가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한 이불을 덮을 수는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5당 통일회의가 열렸는데(1935년),

의열단(공산당 김두봉, 김원봉) + 신한독당(한국독립당+한국혁명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 미주대한인독립단 = ‘조선 민족 혁명당’ (통일 독립단체지만 공산주의 성향이 배경) 으로 통일.

이 무렵 ‘항주’에 있던 유명무실한 임시정부를 의열단 김두봉, 김원봉은 없애버리자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가흥에 배를 띄우고 “김구와,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이 모여 선상 회의를 한 결과 “이동녕, 조완구, 김구+송병조, 차이석”을 5인의 국무위원으로 선출하고 임정 활동을 재개하였다. 임정을 지지하는 당이 필요함을 느끼고 김구등은 1935년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나중에1945년에는 한국 독립당으로 합당함(한국 국민당+재건 한국 독립당+조선 혁명당))

이무렵 김구를 체포하려는 왜놈들이 중국에게 남경의 낙양군교에 한국학생을 받지 말라고 명령하였고, 김구도 체포하려 했으나 잡지 못했다.

조선 민족 혁명당은 바로 해체되었고 1937년(62세)에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며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 로 다시 하나로 뭉쳤고 임시정부도 발전하게 되었다.

9. 남경에서 ‘주애보’와 생활할 때 큰 폭격이 있어서 집을 나와보니 천장이 내려 앉았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어머니도 찾아가 보았는데 곽락원 여사도 무사히 다치지 않으셨다.

10. 두번째의 장소인 장사로 이주(1938년, 김구 본명 사용하기 시작)

“상해”, “항주”, “남경” 있던 대한 민국의 모든 식구들(약 100명)을 물가가 싼 호남성의 “장사”로 이주시켰다. 장사에서의 짧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편, 3당 간부들의 모임이 남목청에서 있을 때 일본 정탐꾼 비슷한 나쁜 놈 “이운환”에 의해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한달간 의식이 없었음 . 장사의 모든 국민들과 중국 장제스 정부 사람들도 모두 걱정이 많았음.

11. 세번째 장소인 광동성의 광주로 이주(1938년)

장제스의 배려로 기차 전체를 빌려 광동성의 광주로 대가족(약 100명)이 다시 이동함.

12. 네번째 장소인 중경 생활(1939년)

1). 대 식구의 이전문제 해결

2). 미주, 하와이 사람들에게 식구들의 중경이주를 알리고 협조 요청하고

3). 각 단체의 통일문제 회의

단체들이 “김원봉(공산주의자)”가 같이 협력하면 김구를 돕지 않겠다고 미주 교포들이 공산주의단체와 손잡지 말것을 종용하였다. 김구는 김원봉과 협의하여 1939년 “동지, 동포 제군에게 고함”이라는 인명선언을 함께 발표한다 . 두 세력은 통일하는 듯 했으나 김원봉이 다른 공산주의 청년동지들이 원하지 않는다며 탈퇴한다. 공산주의 단체는 다 빠져버렸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힘이 다 합쳐졌다. 김구는 유일한 주석으로 추대되어 명실상부한 대통령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40년 65세)

13. 중경 정착과 광복군 창설

중경의 토교 동감폭포 위쪽의 구역을 매입하여 기와집 3동을 건축, 도로변 기와집 1동을 매입하여 100여인 식구들의 머물곳을 정해주었다.

중경 가릉관에서 1940년 9월 17일 성대하게 한국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중국군은 자신의 예하부대 쯤으로 생각하며 중국의 유치 장군을 보내 축하했고, 미군도 거들었다.

1942년 한국에서 젊은 학도병들이 광복군에 지원하여 왔는데 일제 징용을 피해 어차피 싸울 거 광복군에 들어가겠다고 자원한 학생들이었다. 그 중에 장준하 선생도 끼어 있었다.

미군 도노반 장군은 긴밀히 협력하여 한국 침투 작전을 공동으로 펼칠것을 약속하였다.

1945년 8월(70세), 중경의 김종만 동포 집에서 유숙하고 사천성 성주 “축소주”와 저녁식사 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축주석이 전화를 받고는 김구에게 “왜적이 항복한답니다”라고 전한다. 그 때 김구는 “아! 왜적이 항복을?!!!!” 이라며 안타까운 탄식을 한다.(우리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을 해야 하는데, 미국이라는 “남”에 의해 자주 독립을 못하고 38선을 기준으로 두 동강이 난 채 일본이 항복했기때문에, 왜놈이 물러간 것은 기쁘지만 한편 안타까움도 크셨을 것이다.)

14.미군과 합동 작전을 펼치려던 광복군 내의 우리군은 슬픔에 잠겼고 미군은 환호성을 지르는 분위기였다. 중국 사회도 어수선했고 임시 정부도 어수선 했다. 일부 사람들은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빨리 본국으로 가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 구 주석은 임시정부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국민에게 정부를 바치고 난 뒤 국무위원이 총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15. 1939 ~ 1945년 7년간의 중경생활을 마감.

가마를 타고 중국 남안 화상산에 곽락원여사 묘소와 죽은 맏아들 인의 묘지를 찾아가 참배하고, 중국에 대표단을 남겨두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 ‘주은래’와 ‘동필무’가 송별연을 크게 열어주었고, 중국 국민당 본부에서도 장제스 주석등이 참여하는 큰 송별연에 임시정부의 위원들이 초대받았다. 1945년 11월 5일, 상해 비행장에 도착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환영해주었다. 김구는 상해생활 14년 +<남경(6년)>+ 중경생활 7년 이렇게 27년을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것이다 . 상해에서 부인 최준례 여사의 무덤을 참배하고 안중근의 아들이면서 민족을 반역한 ‘안준생’을 잡아 사형하라고 중국 정부에 부탁하고 10여일을 지낸후 김포공항으로 출발했다.

16. 27년만에 한국으로

미 군정하에서 대한민국 정부 주석(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밖에 입국할 수 없었지만, 김포 공항에 도착하자 한국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환영이 있었다. 일제 시대때 거부였던 최창학씨 사택(현재 강북 삼성병원자리)에서 기거하였고 신문에 윤봉길, 이봉창, 김경득의 유가족들이 있으면 찾아오라는 광고를 실었다. 예산에서 윤봉길 가족, 서울에서 이봉창의 질녀, 강화와 인천에서 김경득의 딸과 친척들이 왔으나 김경득의 아들은 38선 북쪽에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1945년을 마무리 하며 대대적인 축하연이 덕수궁에서 펼쳐졌는데 미국측의 최고 사령관인 “하지 중장”도 참석했고, 서울에서 모인 기생들만해도 400명, 테이블도 400개 이상이 차려진 성대한 축하연이었다.

17. 1946년 일흔 한살이 되었고 지방에서 순시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1차로는 인천을, 2차로는 공주의 마곡사를, 3차로는 예산 시량리 윤봉길의 본가를 4월 29일 마침 방문하게 되었다. 3차 순회 강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 유골의 환국을 지시했고, 유골이 부산항에 도착하면서 대한민국은 마치 임금님이 돌아가신 듯한 “국장의 분위기”로 그 열사들의 유골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을 가졌다. 서울에서 태고사에 봉안하고 용산 효창원에 매장했다.

18. 삼남지방 순회와 계속되는 순회

1차로는 비행기로 제주도를 돌아보고 삼성혈 참배,

2차로는 부산역을 경유하여 진해에 가서 해군 열병식. 통영 한산도 제승당 방문,

보성군 득량리에서 48년 전 유숙하며 지냈던 ‘김광언”씨 가옥에 방문함. 아는 사람은 거의 사망.

3차로는 광주를 돌아봄. 인산인해의 시민들 환영.

4차로는 함평을 방문하고 나주를 방문.

5차로는 김해에서 수로왕릉 추향에 참여.

6차로는 창원, 진전, 진주

7차로는 전주에 도착하여 김형진(스물 살 경에 중국에 같이 갔다 온 친구)의 자식들을 만남.

8차로는 목포, 군산, 강경 등을 시찰

9차로는 춘천 가정리 유인석 선생의 묘에 참배

10차로는 인천 무의도에 도착하여 예전에 기거했던 김경득씨의 동생 김진경집에 들름.

19. 서부조선(개성) 순회

서울에서 잠시 쉬고, 38선 이남 지방의 개성을 둘러 봄.

1차로는 개성에서 만월대와 선죽교 구경, 고려인삼제조공장 시찰. 환영식.

백천온천을 경유

‘연안’에 도착하여 잊을수 없는 기억의 효자 ‘이창매’의 묘를 참배. 71세인 김구는 중국땅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임. 연안의 큰 학교 운동장에서 인산인해의 군중앞에서 강연함.

청단에 도착하여 김구의 고향 해주를 38선 이북이므로 먼발치에서 보고만 돌아섰다. 서울로 오는 길에 장단 ‘고랑포’에 들러 ‘신라 경순왕릉’을 참배하고 문산에서 강연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여기까지가 하권 내용의 끝이다***

요약 후기 :

김 구 선생님?, 김 구 대통령?, 김 구 어르신? 뭐라고 불러야 할까 잠시 고민해보면 당시의 명칭대로 “김구 주석’이 좋겠지만 나에게는 김 구 선생님이 편하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겠다.

김 구 선생님은 일제시대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나의 소원에도 나와 있지만 오직 대한민국이 완전한 자주 독립을 이루어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과 계속 교육을 통해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그러한 가치를 심어주고 싶어하신 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떳떳한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으로 다른 나라라는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아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나라를 교육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그의 삶을 우리 한국 사람들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념이나 사상의 잣대로 김 구를 평가하려는 사람은 미친놈이다. 김 구는 그냥 김 구이다. 김 구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백범일지(전체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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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범 일 지

내용이 긴 감상문입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본문 마지막 굵은 글로 쓴 <나의 소원>을 읽어 보세요.

많지 않은 책을 읽고 있지만 최고의 인생 책이 되고, 최고의 철학서가 되어준 귀중한 책입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많은 분들이 읽어 봤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다시한번 내용을 감상해 보시고 안 읽어 본 분들이라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청소년 추천도서로 지정되어 많은 학생들이 읽도록 되어 있으나, 성인들도 읽어보면 내가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이유와 민족정신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단순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니까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속된 나의 국가가 왜 필요한지도 다시금 느낄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깊은 생각이 담긴 <두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와 책 마지막에 나오는 <나의 소원>은 책을 읽기가 힘든 분들을 위해 따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지은이: 김 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항상 역사 관련서적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요한 책을 늦게 읽게 된 것에 대해서 자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역사에도 많은 위인들이 있지만 조선 말기에 태어나 한일합방을 겪고 해방되기까지 인생전체가 우리나라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해온 분인 만큼 읽고 나서 많은 감명과 여러 가지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더 대단한 것은 그 많은 고난 속에서도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오로지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뚜렷하게 확립한 것은 지금 현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인 김구 선생님의 생애를 보면 1876년 출생, 1949년 육군 장교 안두희의 총탄에 맞고 서거할 때까지 일제의 조선침탈과 함께 민족의 고난과 수난을 같이한 근대 역사와 함께 전 생애를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항일운동으로 계속 왜의 현상금 수배범으로 지목되어 계속되는 도주와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위기감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53세에 백범의 어린 시절부터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 임시정부에 이동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두 아들에게 전하는 상권의 백범일지가 쓰여 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상해로 이동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67세의 나이에 해방되어 환국하기까지의 일기가 하권으로 쓰여져 일제강점기의 끝없는 도주와 경각에 달린 사선의 위기 속에서 나라의 위기와 함께 한 역사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상권의 내용 살펴보기

김구의 집안은 원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족이었고 수년 후 선조인 김자점의 청나라와 내통으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황해도로 도주해서 해주에 정착하게 된었다는 내용으로 시작이 됩니다.

어릴 적 김구는 ‘창암’으로 불리웠습니다. 누가나 한번쯤 겪어봤을 개구쟁이 적 시절을 보내고 철이 들면서 자신은 관상으로는 크게 될 위인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 아버지가 마련해준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힙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17살 때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러 해주에 가지만 순수하고 어린 김구로서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맙니다. 세상을 살만큼 살아온 촌로들까지 관직을 사기 위해 매관매직을 하는가 하면 과거를 합격하려고 시험관들에게 갖은 회유를 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다시 고향에 와서 관상이나 풍수지리, 병서를 읽으면서 훈장을 하게 됩니다.

이후 동학의 길로 접어들어 세상의 만인은 평등하다는 평등주의 심취하게 되고 포덕(기독교로 말하면 선교)활동에 매진해서 어린 나이에 접주가 됩니다. 그러던 중 전라도 고부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전국의 동학교도들이 연합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은 청과 일본의 힘을 빌어 동학교도들을 비적으로 칭하고 탄압, 토벌하게 됩니다. 그 뒤 귀향길에 삼남지방(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의 남부지방)에서 올라온 동학 세력과 척양척왜를 외치며 해주성을 습격하지만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 당시 동학군의 일부세력이 배신하고 습격을 받아 대패하게 된 것입니다.

도주하던 김구는 신천에서 동학 토벌세력인 진사 안태훈의 배려로 은거하게 되었으며, 위정척사(유교를 숭상하는 개화반대파)계열인 유인석의 동문인 고능선의 문하생이 됩니다. 안태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이고, 이 시기에 안중근과 가까이 지내게 됩니다. 고능선으로부터 유교의 가치관을 전수받기도 하지만, 나중에 척양척왜가 망국의 지름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배를 받거나 정복을 당하자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문물은 받아들여 부국강병에 힘을 실어야 된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이지요.

1895년 만주로 건너가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지만 이 역시 참패하게 됩니다. 얼마 뒤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되어 큰 충격을 받고 1896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고 은신하다가 체포되게 됩니다. 이듬해 사형이 확정되어 형이 집행되기 전에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 되었으나 일본 공사의 압력으로 출옥하지는 못합니다. 1898년 자의로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로 올라와 승려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일 년이 채 지나기 전에 다시 환속하게 됩니다.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파 인사들과 교육과 애국계몽활동을 하게 되고 교원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부지식인들만의 반대운동은 역부족이었고, 무지한 민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교육사업과 계몽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9년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되자, 김구는 사건 관련자로 일본헌병대로 끌려가서 수감되지만 불기소로 풀려나게 됩니다. 이후 안창호가 주도하는 비밀애국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내에서는 무력항쟁을 하고 만주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세워 일제와 투쟁을 결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주에 독립군을 세우기 위해 부호들을 협박했다는 혐의를 받는 안명근(안중근의 사촌형제)의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받고 수감됩니다. 수감중 동료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일부는 죽어나가고 일부는 회유하여 변절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복역중 감형되어 1914년 출옥하게 되고 소작인을 상대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게 됩니다.

하권 내용 살펴보기

하권은 김구 선생이 주로 상해 임시정부 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상해로 망명한 첫해에 안창호의 권유로 경무국장이 되고 국무총리대리, 국무위원 겸 주석까지 거치게 됩니다.

임시정부 활동에 있어서 내부의 여러 갈등이 있었음 알 수 있습니다. 임시정부 내에서도 여러파가 갈라졌지만 특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반대를 했습니다. 우리민족만의 독자적인 사상의 기초에서 독립을 해야지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의존하여 지배되는 것은 임시정부의 헌장에도 위배가 되고 완전한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리하여 1928년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했습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합니다. 그 중에서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이 의거로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강력한 탄압에 상해를 탈출하게 됩니다.

중국의 여러 곳을 피신 생활을 하던 김구는 1933년 난징에서 장개석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 투쟁방식에 대해 협의를 하게 됩니다. 이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한국 국민당을 조직하고 국무위원에 재선됩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다시 임시정부를 장수성 전장으로 옮기는 한편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던 독립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을 한국 독립당으로 통합하고 주석으로 추대됩니다. 이 후 ‘대한민국건국강령’발표하고 한국의 건국정신은 정치 경제·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삼균주의에 있음을 말합니다. 3·1독립선언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는 민족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물리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을 벗겨 새로운 민주제도를 확립하고 사회계급을 타파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좌우합작 타협의 소산물이었습니다. 이 좌우합작은 전 민족적 차원에서 결성된 것이 아닌 김구와 김원봉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좌우연합전선상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이는 이들을 주체로 민족해방을 쟁취한 뒤 추진할 새로운 국가건설의 가늠자로서 임시정부의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광복과 독립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특이할 만한 것은 광복 직전인 1944년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학도병이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했으며, 미육군OSS와 제휴하여 국내 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를 편성하고 계획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양성했던 군사인력을 활용해 보지도 못하고 김구가 원했던 조국의 완전한 자주적인 독립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임정활동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회주의와 김구가 주장하는 민족주의의 대립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38선을 갈라놓았고 미, 영, 소, 중국의 신탁통치안이 결의가 되기에 이릅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김구는 반탁통치투쟁에 들어가게 되고 외세를 제외한 완전자주독립을 주장하게 됩니다.

수십년간을 독립운동을 했지만, 한반도는 다시 38선으로 갈라지게 되고 김구는 또다시 남북을 갈라놓은 38선을 없애기 위해 1948년 평양 모란봉에서 남북협상을 하게 됩니다.이미 2월13일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란 글에서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용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통일을 위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가슴깊이 다가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고 맙니다.

전체 감상문

먼저 백범의 이름이 김창암에서 김창수 그리고 백범 김구가 되기까지를 설명합니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평범한 사람)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느님께 빌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198p)

독립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자신의 이름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생기면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다는 마음도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해에 가서 가장 맡고 싶은 직책이 무엇이냐고 안창호 선생이 물으니 김구선생은 바로 ‘문지기’라고 말한 것이지요.

상권과 하권은 김구선생의 전 생애에 걸친 일기입니다. 일기만 봐도 개인적인 평화와 가족의 안락함을 가진 시기는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간도특설대>를 보면 독립운동이나 항일 투쟁을 하다가 고통과 고난에 못이겨 변절하는 독립투사들도 많았습니다. 그 속에서도 그 많은 고통을 모두 이겨내고 평생을 항일운동에 온 인생을 받친 김구선생과 독립투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임시정부 활동 중 많은 독립투사들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휩쓸리고 김구선생과 같은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주독립을 외친 독립투사들과 사상적으로 갈라져 해방이후까지 이념대립이 계속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해방 후에도 김구 선생이 이 일을 해결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지만 좌우통일을 이루지 못한 결과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민족적으로 보면 너무도 비극적인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투사들의 항일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은 역사에서 배운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감상문에는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김구 선생님이 책 마지막에 남긴 ‘나의 소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한평생을 나라 잃은 죄로 피신과 독립운동으로 고단한 인생이었지만, 그 속에서 가슴깊이 새겨진 민족의식과 철학은 다른 어떤 수양서나 사상적 이념보다도 내 마음 속 깊이 다가 왔습니다. 많은 국가통치이념이나 국가철학이 있지만 이보다 더 좋은 민족적 국가이념이 더 나올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나의 소원’에 나오는 한 구절 한 구절 주옥같아서 모든 내용을 이 글에 인용하고 싶지만 고르고 골라 몇 구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의 소원의 ‘민족국가’

처음에 첫 째도 둘 째도 셋 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고 대답하며 하는 말입니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세상에서는 실감하지 못하지요. 김구 선생께서는 젊어서 자주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를 빼앗기는 경험을 하고 다시 자주독립을 하기 위해 평생을 살면서 한 나라의 평범한 국민이 되기를 얼마나 소망하였는가를 짧은 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민족이 다른 나라에 식민지가 되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경험들은 독립에 대한 정신과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장,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해방전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이념적,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와 갈라져서 신탁통치에 관한 반대의 신념으로 우리나라의 답답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했습니다. 독립을 했으나 독립운동 중에 공산주의자들과 합세한 세력과 분할 통치의 아픈 역사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으니 김구 선생님이 원했던 자주적 독립과 통일은 이념적 대립 때문에 안타깝게도 현재에도 진행형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김구선생이 이렇게 폭 넓은 세계관과 국가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공자, 석가, 예수 등 많은 종교와 철학 서적을 탐독하여 우리민족이 가져야할 독특한 이념적 철학을 세울 수 있었다는데 주목을 하고 싶습니다. 김구 선생님이 만약 한가지 종교나 철학에 매진했다면 바로 공산주의의 맹신자가 되거나 한 가지 종교에 맹신하게 되어 또 다른 독재를 불러서 다른 위기를 불러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으로 나타난 게 지금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이기도 하고요. 그 이유는 ‘민족국가’에서 계속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나의 소원의 ‘정치 이념’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지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거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수많은 정치, 종교, 철학 사상이 있지만 이처럼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설명한 글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해주는 김구 선생의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나 역시도 학교 교육을 통해 성장했지만, 학교 교육 역시도 얼마나 편협된 것인가를 세상을 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역사나 예절교육을 통해 주입된 유교 사상이란 것이 알고 보면 조선시대 오백년 역사동안의 기득권 세력들의 자기합리화란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는 충, 효 같은 예절 교육을 가르치면서 양반들이나 군주는 종이나 계집종으로 신분을 나누거나 자기 재산의 일부로 생각하고 본처 후처 등으로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또한 후처나 계집종으로부터 생겨난 자식들은 자기 자식으로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을 보면 얼마나 그 당시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이란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자기 개인주의에 빠진 독단이어나를 알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님이 말하는 한 가지 철학을 기초로한 계급독재의 병폐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백범이 이러한 객관적인 가치관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고민을 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조국에 대해서 얼마나 냉정하게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글입니다.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의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갸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본문 상권에서 백범은 나라를 빼앗기고 소수의 지식인들만으로 다시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할 때부터 교육에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문맹의 국민들에게 계몽을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 지도층은 지식인들을 사상범으로 몰아 가두고 고문을 하고 회유를 하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만큼 깨어있는 국민들이 중요함을 느끼고 교육의 중요성이 국가 존립의 큰 뿌리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행히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백범이 원하는 교육국가가 되기도 했는데요.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주권국가인 대한민국 안에서 다른나라 국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몇몇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런 백범의 가치관을 하루 빨리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소원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적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왜의 침략으로 독립을 위해 수많은 위기와 독립투사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은 인류화합과 문화의 융성이란 말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고 국가의 소중함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글입니다.

다행히도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는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으로도 백범이 원하는 나라에 가깝게 된 것 같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등을 하는 분야가 많아 졌고 그 중 문화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한류문화로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음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최소한 백범에게 부끄럽지만은 않다고 생각됩니다. 하나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북과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범이 언급한 바와 같이 아직도 주변 4대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의 자주적인 통일을 하기기 쉽지 않은 상황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우리가 만들고 이룩해 나가야 할 역사의 과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오천년 역사를 지켜오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구자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후손들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많지 않은 독서를 해오고 있지만 이만한 철학을 담고 있고 민족적 자긍심을 주는 글은 더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백범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에게 큰 빚을 지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요즘 전세계가 코로나 사태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위기를 잘 극복하고 안정화 단계에 있고 다른 나라에 비해 모범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 바탕에는 5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세의 침공이 있어왔고 그때마다 국난을 이겨낸 민족적 근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에는 가장 치욕적인 역사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어떤 때에도 빼앗기지 않았던 국권까지 빼앗기고 수많은 국가적 침탈과 수모를 겪어야 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에 백범같은 위인이 우리에게 지금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권을 빼앗기기 전의 나라의 상황을 보면 앞서 백범이 지적했듯이 앞선 조선시대 오백년동안 길고 긴 계급 독재가 존재해 왔습니다. 민비는 국내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청을 끌어들이고 다시 일본군대까지 동원해서 동학난을 제압하였습니다. 일부 역사에서는 민비같은 사람들을 위인으로 미화하기까지 하지만 국권을 상실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의 정치인 중에도 국난이 생기면 나라 팔아먹을 정치 지도자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는 국민을 말하고 돌아서서는 자신의 사익을 취하는 정치인들 말입니다. 다행히도 현재는 조선시대와 다른 민주국가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어 국민이 올바른 지도자를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은 누가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하고 백범선생이 원하는 나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냉정한 눈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백범일지가 갖는 위대한 자료로 남아있는 것은 작게는 개인의 일기지만, 많은 부분이 대한민국의 근대사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는 <안네의 일기>가 쓰여져 세계적인 고전문학으로 남았습니다. 안네 프랑크 역시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 없이 사라졌음에도 홀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지요. 안네의 일기는 단순히 문학 작품으로 남았지만, <백범 일지>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당히 우리역사에 기록되고 세계사에 기록 될 우리의 민족적 가치관을 가진 역사의 보물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분들이 이 책 <백범일지>를 읽어 보셨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만약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꼭 한번 읽기를 추천 드리며, 책을 읽기가 부담되시는 분들이라면 책 머리말(인. 신 두 아들에게)과 뒷부분의 ‘나의 소원’이라도 읽어보기를 추천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백범 선생님의 생각을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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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백범김구) 독서감상문(독후감)

백범일지(김구)를 읽고

이번에 읽은 책은 백범 일지로써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라 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신 독립 운동가 김구 선생님의 자서전이다. 김구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모인 명성 황후를 해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을 죽여서 감옥에 갈 정도로 애국심이 대단하신 분이다. 김구는 1876년(고종 13년) 황해도 해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녔는데 이때 하루도 거르지 않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글방에 다녔을 만큼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했다. 김구는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숟가락으로 엿을 바꿔먹고 아버지의 돈주머니를 훔쳐서 떡을 사 먹으려 했을 만큼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그는 그 일로 반성하고 아버지의 충고를 들어가면서 쓰러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하여 과거를 보러 갔지만, 시험도 치지 않고 돌아왔다. 썩어빠진 시험장의 모습에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점점 어려워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이 것을 보고 김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옳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선봉 자이 되었고 또 1896년에는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를 처단함으로써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 2년 후 나갈 기미가 없자 탈옥해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 학교를 설립하고 국내 최대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또한 4년 뒤 출옥한 뒤에는 농민 계몽 운동을 전개했으며 1919년 3월 1일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김구는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광복군을 훈련시키며 일본군을 무찌를 계획을 세웠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내외에 큰 영향을 끼쳐 일제의 추격을 당해 피신생활을 하면서도 한인 청년들을 중국 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했다. 1940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면 항상 항일 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1945년 드디어 선생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조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선생의 끝이 아니라 선생은 그 후 민족통일을 위한 운동을 끝없이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4년 후 통일운동을 저해하려던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김구는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의 총에 맞아 죽었으니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나라 사랑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마음을 다시 잡아야겠다. 우리들을 위해 조국을 위해 싸우셨던 분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우리들도 김구 선생님의 사상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더욱 노력해서 다른 나라들에게 우리나라를 알려서 강대국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비록 항상은 아니더라도 이 분들의 희생에 감사하면서 조국을 더욱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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